책 소개
더는 침묵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이제는 그들이 답할 차례
흠은 있을지언정 단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들. 언제나 자기 자신이 되고자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_소설가 김세희
뉴욕예술재단 창작기금, 호프우드 문학상을 수상한 주목받는 신예 대니엘 래저린(Danielle Lazarin)의 첫 소설집 『반박하는 여자들』(Back Talk)이 ㈜미디어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여성들의 서사는 등장만으로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더 다양한 그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은 그간 남성 화자는 한 적 없던(혹은 할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들이 어느 때보다 대담하고 솔직하게, 그래서 더욱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담겨 있는 작품이다.
대니엘 래저린은 “독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단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인 양 유사한 공간에서 여성서사가 끝나기를 바란다”(Girls at Library 인터뷰)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첫 소설집은 이러한 기대와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수록된 16편의 소설은 그간 비가시화되고 납작하게만 그려졌던 여성의 욕망이 얼마나 다종다양할 수 있는지를 일련의 사건과 함께 개연성 있게 펼쳐 보인다. 사춘기와 결혼, 이혼과 불륜이라는 사적 경험과 서사에서 여성이 그 주체가 되었을 때, 여성의 목소리는 하나의 사건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여성 보편의 문제로 환원되는 현실적 매개체가 되어준다.
평범하기에 비로소 나일 수 있는 이야기들
그러나 너는 침묵을 선택한다. 네 남자 친구에게도, 그 개새끼에게도, 그 개새끼 여자 친구에게도. 그 여자애는 자기 남자 친구 말을 믿는다. 반박되지 않는 주장은 쉽사리 믿게 되니까.
이제 네 남자 친구는 묻는다. 그럴 가치가 있었어? 좋았어? 그러고도 괜찮을 줄 알았어? _「반박」 226면
작가는 “나의 캐릭터들은 여러 방식으로 평범하며, 대부분은 결혼했거나 아이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것들이 여성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그녀들의 충돌과 선택을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하며 반영하고 싶었다”(Fiction writers Review 인터뷰)라고 밝히기도 했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이야기에서든 현재 혹은 한때의 나와 같은 인물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이 별로 없는 편인 남자애는 주변에 그 얘기를 다 떠들고 다녀서 화요일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그러나 너는 침묵을 선택한다. _같은 면
「반박」은 미국 나이 15살의 여성 화자가 써내려가는 첨예한 독백이다. 자신의 몸을 원하는 남자의 요구와 이후의 소문에 대해 침묵을 택한 여성. 독백으로나마 하지 못한 말을 분출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침묵이 동의로 간주되는 사회에 던지는 분노와 항변으로 읽힌다.
그때 레브는 최대한 또렷하게 발음하려고 세면대에 치약을 뱉고, 욕실 문 밖으로 고개까지 내밀고서 외쳤다. 내게 그 말을 확실히 들려주고 싶어서, 여자의 사생활을 가까이에서 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자신의 재치를 자랑하고 싶어서. _「평면도」 71면
고독한 도시에서 사적인 공간은 여성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내놓은 화자는 이웃에 사는 줄리엣과 친구가 된다. 줄리엣의 남편이 집을 비운 날이면 그녀의 집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성의 모습은 서로 다른 환부와 경험을 공유했을 때, 이것이 어떻게 공감받고 치유될 수 있는지를 담백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사는 나를 상상해본다. (···)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가망이 없는 지금의 나도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를. _「두 번째 가족」 347면
「두 번째 가족」에서 화자는 아빠의 두 번째 가족의 딸이고, 출산을 앞둔 이복 언니의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돌보고 있다. 일과 연애에서 흔들림을 겪으며 이십 대를 통과하는 화자에게, 분리된 삶이라 여겼던 아빠의 첫 번째 가족들과의 교류가 어느새 편안한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누군가 한 명쯤은 울면서 끝나는 놀이판에 참여했다가 형제끼리 서로를 희생양 삼곤 한다. 그러지 않는 형제는 우리 동네에서 오로지 나와 V뿐이다. V와 내게는 서로밖에 없다. _「홀로그램 영혼」 159면
아직은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게 많은 유년 시절만큼 자매애가 빛을 발하는 시기가 또 있을까. 「홀로그램 영혼」에서 화자의 동생 V(버네사)는 어른들과 친구들의 비아냥에도 자신이 마술을 부릴 수 있다고 굳게 믿지만, 엄마의 먼 여행이 두렵기만 한 아이일 뿐이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자신의 길을 떠난 동생의 빈자리를 더듬어보는 언니의 시선은 유약하지만 같이 있음에 용감했던 유년 시절을 따스하게 보듬는다.
큰 꿈과 체념이 공존하는 뉴욕
『반박하는 여자들』의 주 배경은 뉴욕이다. 저자는 뉴욕 브롱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맨해튼에 살고 있다. 그의 소설에는 뉴욕의 면모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조용한 소도시 브롱크스의 모습이고(「식욕」 「신체 측정」 「숨바꼭질」 「사라지다」), 또 하나는 화려하지만 그래서 외로운 대도시로서의 뉴욕이다(「거미 다리」 「두 번째 가족」).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러 상황에 노출됨으로써 내면의 성장을 겪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이런 양가적인 모습을 동시에 지닌 뉴욕이라는 도시는 어쩌면 그들의 내면을 형상화하기에 최적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이런 뉴욕이기에 어느 순간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지금 여기의 우리와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 문제와 더불어 인종문제, 교육과 신분, 계급과 계층 이슈가 맞물려 펼쳐지는 뉴욕에서, 나 하나의 문제는 바로 옆의 다른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니엘 래저린의 소설은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여성을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가 힘이 되어 비로소 정체성을 완성해가는 장면들을, 그동안 바라왔지만 쉽게 들을 수 없던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섬세하고 적확한 풍경으로 담아낸다.
추천사
내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청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무엇이 당신을 당신으로 만들었나요?” 『반박하는 여자들』에 실린 열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어떤 순간을 지나는 중이다. 한때 전부였던 관계를 뒤로하기도 하고,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욕망에 이끌려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그녀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서서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건 당황스럽고, 고독하며, 마음이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니엘 래저린의 인물들은 호들갑을 떠는 부류가 아니다. 분노에 차 있을 때조차 그녀들의 시선은 냉철하다. “정말로 그랬나? 물론 정말로 그랬다.” 아마 그녀들이 이미 그 이후의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알 것 같다. 그녀들이 흠은 있을지언정 단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걸. 언제나 자기 자신이 되고자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_소설가 김세희
여성에 관한 소설이란 ‘가정적’이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_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의 작가 실레스트 잉
이 소설들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다. 세계 전체를 보여주는 창문이다.
_『부자와 미인』(Rich and Pretty)의 작가 루만 앨럼
대니엘 래저린이 이런 소설들을 백만 편쯤 더 써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영원히 읽을 수 있도록.
_『평행 우주 속의 소녀』의 작가 아일린 폴락
차례
식욕
평면도
거미 다리
신체 측정
내가 사랑하지 않은 파리의 미국 남자들
방범창
홀로그램 영혼
풍경 27
숨바꼭질
반박
연인을 위한 전망대
공룡들
사라지다
도둑 찾기
빨간불, 초록불
두 번째 가족
옮긴이의 말
추천사
저자 소개
_대니엘 래저린 (글)
뉴욕에서 태어나 오벌린 칼리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미시간 대학에서 헬렌 젤 문예창작과정을 밟고,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예술재단의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호프우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반박하는 여자들』이 첫 소설집이다.
저자 소개
_김지현 (옮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단편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 대산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고, 환상 문학 웹진 『거울』에 창작 및 번역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레딩 감옥의 노래』 『오늘 너무 슬픔』 『흉가』 『피뢰침』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