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천재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미발표 소설 첫 공개
이 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실비아 플라스를 읽어야 하는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_뉴욕 타임스
실비아 플라스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미디어창비)이 60여 년 만에 최초 공개된다. 1952년에 쓰인 이 작품은 정식 출간되지 않은 채 인디애나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9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페이버 앤드 페이버에서 초고를 그대로 살린 판본으로 펴냈다. 소설은 ‘메리 벤투라’라는 한 소녀가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홀로 기차 여행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이 어린 여성이 알고 있는 사실은 손에 쥔 티켓이 종착역 ‘아홉 번째 왕국’으로 향하는 편도행이라는 것뿐. 실비아 플라스 작품 세계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초기작으로, 한국어판은 시인 진은영의 번역으로 더욱 기대를 모은다.
스무 살, 실비아 플라스의 숨겨진 얼굴을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 진은영의 안내로 만나다
『라이프』는 실비아 플라스를 두고 “존재 자체가 문학에서의 한 사건”이라 칭한 바 있다. 『보스턴 글로브』는 그의 소설 『벨 자』를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할 걸작으로 꼽기도 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분노를 과감하게 그려내며 현대 영미 시에서 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천재 시인이자, 페미니즘 문학의 대명사로 불리어왔다. 그의 독보적인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런 그조차도 여성 시인으로서 시어가 모호하다는 단편적인 해석으로 일축되거나, 신비롭다는 말로 대상화되기 일쑤였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은 그가 훗날 남긴 걸작들에 비한다면 문학적으로는 소품에 그칠지 모르나, ‘실비아 플라스’라는 한 세계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서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플라스 연구자 피터 K. 스타인버그는 이 작품이 플라스가 이전, 그리고 이후에 쓴 작품들과도 명백히 구별되는 독특한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일견 『성경』이나 단테의 『신곡』을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의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설정이 플라스의 여성주의적 다시 쓰기 시도임을 피력한다.
스무 살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주인공 메리 벤투라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처음으로 혼자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순간이랄까요.’
문학에서 여행과 모험은 오랫동안 소년들의 차지였다. 1952년, 이 작품이 쓰였을 당시에는 10대 여성이 부모의 보호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낯설게 여겨졌을 법하다. 실비아 플라스의 많은 작품이 기성 질서와 불화한다는 이유로 일부 독자에게는 불편함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불화’에서야말로 비로소 자신을 이해받는 기쁨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다. 불쾌를 토로하는 세간의 우려와는 달리, 이 불화가 언제나 파괴적인 전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 안에서 메리의 탈주는 세계와의 단절이 아닌, 오히려 다른 세계로의 통합을 암시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하나의 인생을 살”지 않기를 간구했다. 일기에서 그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안온한 삶에서 벗어나 기꺼이 “난장판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고백한다. 비록 그 자신은 바람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대신 자신이 창조해낸 작품 속 인물 메리에게만큼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선물로 쥐어준다. 메리는 현명한 여성의 지지 속에, 자신이 주체로서 환대받을 수 있는 세계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신뢰할 수 있는 여성과 맺는 우정의 연대
실비아 플라스는 새로운 방식의 탈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과의 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 이 소설에서 우리는 불길한 기차 여행에 대해 묻고 자신의 불안을 말하며 커피와 초콜릿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여성적 존재에 대한 그의 갈망을 엿볼 수 있다. _‘옮긴이의 말’(80-81면)
소설에서 주인공 메리만큼이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메리의 옆자리 여성이다.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그는 푸른 눈에, 갈색 사첼백을 든 모습으로 그려질 따름이다. 책의 서두에서 “아직 여행할 준비가 안 돼 있단” 메리의 불안은 그저 과민할 뿐이라는 아버지의 부정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푸른 눈의 여성은 첫 만남부터 “여기 자리 있니?”라고 물으며 메리의 뜻을 존중한다. 그는 메리를 근사한 식당차에 데려가주는가 하면, 앞자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내아이들에게는 부끄러운 줄 알라며 주의를 준다. 그러나 정작 아홉 번째 왕국이 가까워질수록 여행에 이상한 기미를 느끼는 메리에게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나? 난 함께 갈 수 없어. 네 스스로 중단해야만 해. 하지만 곧 보게 될 거야, 꼭.”(59면)
푸른 눈의 여성은 메리의 잠들어 있던 의지를 일깨우지만, 기차에서 내릴지 선택하는 것은 메리의 몫이다. 만약 그가 기차를 멈추어준다면, 메리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여행에 오른 잘못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그는 다만 메리에게 환히 불을 밝힌 입구가 아니라 캄캄한 계단으로 가야 한다는 조언을 할 뿐이다. 오직 자신을 믿고, 어두운 길을 택하라는 당부에 메리는 아무런 질문도, 인사도 없이 단지 “네.”라고 두 번 답한다. 이것이 그들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다. 서로 신뢰하는 두 사람 사이에 이제 더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반세기가 지나 마침내 우리에게 당도한,
실비아 플라스로 향하는 편도행 티켓
비상 정차 줄을 당겨 기차에서 내린 메리는 약속대로 눈부신 입구가 아닌, 불이 꺼져 위험해 보이는 계단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끝내 제힘으로 자유를 손에 쥔다. 플라스는 이 순간의 메리를 “죽음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다고 적고 있다. 기차가 출발할 때 가을이었던 계절은 메리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어느새 봄으로 바뀌어 있다. 하얀 장미와 수선화가 가득한 거리에서 갈색 코트 차림의 한 여자가 푸른 눈빛으로 메리를 맞아준다. 세심한 독자라면 여자의 눈동자와 코트 색깔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리라.
현실 속 실비아 플라스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염원을, 그대로 살지 않겠다는 비극적인 결심으로 굴절시켜서야 이룬다. 하지만 소설 속 메리에게 다정하게 초콜릿을 나눠주는 푸른 눈의 동행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작품들이 삶이라는 여정에서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준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대신 써주는 일이 가능할까? 실비아 플라스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은 자전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다. 이 작품은 혼자만의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편적인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이 소설이 처음 쓰여진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스무 살을 앞둔 여성은 자신을 온전히 설명해줄 진실한 언어를 찾아 헤맨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새로운 자기만의 언어로, 반세기 전 한 시인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부쳐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쪼개진 세상의 틈에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흘러나온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슬픔이 나 혼자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기분 좋고 숭고한 감정을 느낀다. 이들은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가능한 일임을 곧 깨닫게 된다. _‘옮긴이의 말’(71-72면)
저자 소개
_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글)
1932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955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유학했다. 생전에 시집 『거상』(The Colossus, 1960)과 소설 『벨 자』(The Bell Jar, 1963)를 펴내고, 1963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81년 출간된 시 전집이 작가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_진은영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를 냈고,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등을 받았다.